개식용 금지가 왜 중요한가.
인간의 올바른 생명윤리와 도덕적 양심회복을 위하여
1. 개식용의 역사적인 배경
1) 한국의 개식용 습관은 전통도 문화도 아니다. 우리 조상은 본래 개와 말을 반려동물로 여기고 가족이나 다름없이 아끼고 사랑했었다. 특히 개는 완전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대우를 받았으며 죽어서도 주인과 함께 묻히기도 했다. 주인이 먼저 떠나가면 나중에 사랑하던 개가 죽었을 때 주인의 묘를 열고 개를 합장해줄 정도로 사랑받았던 존재가 바로 우리 민족의 반려동물이었고 신성시 여겼던 ‘개’라는 동물이다.
2) 지금처럼 개식용이 마치 민족의 자존심이나 지키는 것처럼 오도되고 만연하게 되었던 이면에는 참으로 가슴 아픈 우리 역사의 단편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가 유교사상을 통하여 퍼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개식용문화가 함께 은근슬쩍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양반들의 사대사상이 자신들의 출세 길에 이용 되더라도 그들의 속내는 개식용을 하는 중국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 해도 씻을 수 없는 결함이 바로 개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인육마저 즐겨 먹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개식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축을 도축하는 것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양반을 제외한 사람들은 육식을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고된 농사일 대부분을 양반을 대신하여 평민이나 천민들이 하였기에 은근슬쩍 일 년에 한 번 정도 개를 잡아먹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복 날엔 양반들은 민어나 수박화채를 즐기며 더위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 개식용이 우리 전통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주장에 불과하며, 일제 강점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개식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개고기 유통업자들의 농간에 불과하다. (첨부하자면, 아직도 성균관에서는 공자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진다. 단군의 자손이 어째서 미개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인 공자를 아직도 추모하고 섬기고 있는 행태에 개탄하는 바이며, 그 유교사상으로 말미암아 개식용이 이처럼 버젓하게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 한국인이 과연 사대주의 사상에 아직도 자신도 모르게 젖어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고 여겨진다. 그 한 예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보다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모델로 쓴 소설책 삼국지가 마치 대단한 교육 자료처럼 여겨지고 있는 한심한 작태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불과 약 7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중국의 삼국시대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우리나라의 찬란했던 800년이 넘는 장구한 삼국시대의 역사를 무시하는 우리는 과연 진정한 단군의 자손이란 말인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
3)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우리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전통 개마저 말살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영혼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신성시 여겨왔던 우리 토종개들을 차례차례 씨가 마르도록 도살해버렸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의 개 삽살개를 들 수 있다. 삽살개는 귀신을 쫓는 영물로서 신성시 여기고 집집마다, 특히 양반가에서는 더욱 소중히 여기며 키워왔던 개였다. 그런데 일제는 군수물품조달의 목적으로 가장 먼저 삽살개를 도살했고, 다른 수십 가지 종에 이르는 우수한 우리 토종견의 씨를 말려버렸다. 털가죽은 방한복을 만들기 위해서 착복해갔고, 개들의 사체는 식용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전문적인 개도살꾼인 ‘개백정’이었다.
개백정은 일제에 개 털가죽을 납품하고 사체를 식용으로 대대적으로 유통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당시의 개백정 또한 자신들의 치부를 위하여 일제에 헌신했던 민족의 반역자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개고기를 먹는 조선인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했고, 야만인이기 때문에 황국시민의 정신을 배우게 해서 순화시켜야 한다며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4) 조선시대에도 개백정은 있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백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서 아무리 천민들이 개고기를 먹기는 했다 해도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극히 미미한 개체 수였기에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활동할 수는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백정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산다는 것은 아마도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비밀리에 행하는 음성적인 아르바이트 같았던 직업이었다고 추측이 된다.
이 시점에서 소를 잡는 ‘백정’과 ‘개백정’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소를 잡는 ‘백정’이라 함은 천하디 천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우리 조상들의 백정은 참으로 고결했던 것 같다. 적어도 도덕적인 양심과 생명에 대한 윤리 의식이 있어 보인다.
물론 모든 백정이 다 고결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 중에는 간혹 백정과 개백정 또는 망나니(인간을 죽이는 직업) 같은 직업을 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정은 오로지 소만 잡았고 백정이라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정이라는 특수한 직업의 성격이 살상을 하는 직업이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정이 소를 잡기 전에는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며, 소와 눈을 마주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러면 두려움과 슬픔에 눈물을 흘리던 소는 백정의 손에 목숨을 맡기는 듯 이내 평화로워지고, 백정은 일순간 정말 단칼에 소의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소는 단칼에 고통 없이 평화로운 영혼으로 일어나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백정은 채식인들 이었고, 소가 남긴 가죽을 다루는 갖바치도 역시 그러했으며, 이들은 함부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스스로 고개를 낮추고 평생을 양심에 의지하며 살고자 했던 우리 조상의 진정한 ‘백정’의 모습은 차라리 수도자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아무리 직책이 높은 양반일지라도 내심 백정을 그리 천하게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중에는 인격이 우수한 분들이 당연히 많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탐욕에 물들지 않고 늘 스스로 죄인인양 속죄하며 수도를 하고, 채식을 하며 정갈하게 살았던 그 옛날의 백정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오로지 생산에만 몰두하고 이윤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현대의 축산업자들에 비한다면 참으로 고운 분들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가 그러한 운명으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의 인간이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인 양심이 고갈되어있다는 것은 예전의 백정과 비교하여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또한, 현대의 개백정 또한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 잔인무도하고 극악함에 치를 떨게 한다.)
그러므로 개식용이 마치 우리의 전통 문화인양 오도하여 우리 고유의 신성한 문화와 역사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개식용은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악습이며, 개식용 찬성론자들이 개식용 반대론자들에게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 사상 운운하는 대목은 오히려 찬성론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다.
2. 문화상대주의와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공존
1) 시대가 변하고 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회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가치관이 점점 퇴색해가고 있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음에 몹시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세계는 녹색성장주의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녹색성장주의도 근본적으로 생명존중사상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생명윤리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헛걸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명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로 진정으로 인류가 바라는 올바른 생명윤리를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발전적인 녹색성장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도 이에 걸맞게 착하게 변모해야 한다. 환경파괴의 원흉이며, 인간성 상실을 부추기는 잔인한 보신악습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세계인류 모두가 원하는 올바른 생명윤리에 맞춰 도덕적 양심을 회복해야만 한다.
2) 우리나라가 개고기를 먹든 말든 우리의 문화이며, 개인의 취향이고 자유이니 다른 나라는 더는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태도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는 마치 형이 이불에 오줌을 쌌으니 나도 싸도 괜찮지 않으냐고 엄마에게 항의하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항변처럼 들린다.
프랑스의 푸와그라가 잔인한 학대에 의해 생산된 음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 역시 개고기가 잔인한 학대와 살상에 의해 생산된 음식이니 먹지 말아야 한다. 또한, 소, 돼지, 닭, 식물도 불쌍하다고 여긴다면 당연히 개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불쌍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인정하고, 모두 다 먹자는 식의 발상은 참으로 일차원적인 발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자기 전에 소변을 보고 자면 아침에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라고 타이르는 엄마에게 그래도 이불에 오줌 쌀 거라며 엄마 앞에서 버젓이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 보이는 어린아이의 불손한 태도와 다를 게 없다.
문화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적인 문화에 대하여 공감하고 인류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성에 합당하다고 인정할 때 쌍방에 문화상대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문화일 경우, 가령, 식인문화, 이슬람권의 여성 할례, 노예제도, 인종차별, 스페인의 비정한 투우, 프랑스의 푸와그라, 호주나 뉴질랜드의 야생동물 식당과 식용, 일본의 포경산업과 고래 고기, 등 열거할 수 없도록 많지만, 그러한 비윤리적이고 비정한 문화라면 당연히 세계인류는 함께 그 상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개식용 문제 역시 우리나라의 고유문화라고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문화상대성을 주장하기엔 참으로 비정하고 미개한 식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가련한 생명을 외면하고, 오로지 인간 편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단순한 먹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에 그 누가 옳다고 찬성하고 문화상대성으로서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랜 세월을 인간과 함께 살도록 진화되어 온 개라는 동물의 생태를 무참하게 짓밟는 개식용 습관은 분명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악습이며, 개라는 동물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이 사회에 과연 다른 동물도 진정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가치조차도 없다.
개나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사랑하며 가족처럼 여기는 대다수의 세계인에게 우리는 식용견을 따로 키워서 잡아먹고 있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것은(실제로 소위 애완견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개들이 개고기로 불법 유통되고 있음), 우리나라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세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개고기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식용으로 죽어가는 개들을 기리며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개식용 찬성론자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그동안 과도한 육식문화로 인해 고통 받았던 가축들의 고통, 환경파괴마저도 인간은 외면하고 굳이 애써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한국인들은 개식용을 아예 합법화하자며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개마저 육식문화의 반열에 올리자는 시대역행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우매하기 짝이 없는 발상은, 참으로 이 사회에 도덕적 양심의 부재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우리 인간이 앞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다 건강하게 살려면, 과도한 육식문화를 축소해 나아가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것임을 우리 인간은 숙고해야만 하며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제 육식으로 이용하는 가축의 종(種)을 줄여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가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음은 사실이며, 따라서 육식문화를 창출해왔던 세계적인 거대한 축산업도 이젠 조금씩 막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지구환경을 파괴해가며 축산업으로 배를 불려왔던 선진국(대표적으로 미국 등)들은 이제 깊이 반성하고 거대한 축산업 조직들과 손을 놓아야 할 것이다.(참고/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저) 이제 우리 인류는 과거의 탐욕스러웠던 거대한 축산업으로 말미암아 훼손 된 환경을 복구하고 잃어버린 양심을 회복하는 일에 노력해야만 한다.
4)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개식용부터 금지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임을 깨달아야 한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개라는 동물을 먹지 않음으로 해서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며, 이 또한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가 원하는 공통적인 보편적 생명윤리에 합당하고 인간으로서 도덕적 양심을 회복하고 또 환경을 지키는 일이며, 인간이기에 그 어떠한 생명의 고통일지라도 무시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도 그렇듯이 모든 생명은 살고 싶어 한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 생명체는 모두 안전하고, 평화롭고, 또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이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할 때 비로소 인류와 동물이 평등하고 아름다운 공존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제 그만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도덕적 양심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미미한 생명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할 줄 알 것이며, 내 가족, 이웃, 더 나아가 지구촌 구석구석 모든 인류의 고통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는 가슴에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삭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인간과 아름다운 공존이 이루어질 때 그 사회는 진정 아름답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동물생명윤리협회 대표 이 비가연 씀.